강화도 강성보 누각
광성진(廣城津)
春風來到廣城樓 津吏迎吾指海洲
三兎三龍三蛇字 知潮有信可行舟
광성보 누각에 봄바람 불어오는데
나루지기 나를 맞으며 바다섬을 가리키네.
묘시 진시 사시의 삼자시가 있으니,
물때를 잘 알아야 배가 갈 수 있다네.
늦은 점심을 마친 우리에게 마지막 코스로 우리의 길라잡이님께서 광성보로 가자신다.
.
지난 여름은 강화초지대교를 건너 초지진과 돌아올 때는
강화대교 쪽인 갑곶돈대를 보고 왔지만
두 돈대의 중간 위치에 있고 육지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외적들과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는 광성보를 가까운 곳에서 놓쳤던 장소였다
광성보 입구에서 손돌목돈대를 거쳐 용두돈대로 돌아왔는데
꽃철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꽃철이 아닌 관계로 사람들에게 밟히지 않는
한적한 광성보를 한바뀌 돌 수 있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없었다.
광성보 1658년 (효종 9년)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여 숙종 5년 1679년에 축조된 곳이고
3개의 돈대 (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와 1개의 포대(광성포대)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고종 8년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단다.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해병대 450명에 의해 이곳 광성보를 지키던
어재연(魚在淵)이하 전 장병은 열세한 무기로 죽을 힘을 다해 싸웠어도
전원 순국한 곳이란다.
이때 성첩과 문루가 파괴된 것을 1976년 복원하는 동시에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魚在淵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 정비하였단다.
신미양요 때 파괴되었던 포좌 4개소와 포 3을 복원 설치하였다
현판 안해루(按海樓)는 "바다를 제압한다" 라는 뜻이다.
천정에는 용의 그림이 있고 문밖으로는 강화 앞바다가 보인다.
강 건너가 김포시인 육지와 가장 가까운 해안으로
외적의 침입이 가장 용이한 거리에 있는 듯하나
물살이 쌔서 만만치는 않았던 곳으로 전해진다.
광성돈대는
숙종 5년 ( 1679년)에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승군(僧軍) 8.000명과
어영군(御營軍) 4.300명이 40일 만에 완공하였다고 전해 온다.
전시된 무기로는 불랑기. 대포 소포이다.
불랑기(佛狼機):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란다.
소포(小砲):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사정거리 300m
대포(大砲):병자호란에 사용되었다는 대포는 홍이포라고도하는데 사정거리 700m
광성돈대 위에 올라가 바라본 안해루의 정경과
바다 건너 김포 쪽을 바라보다
이 길을 걸어가면서 앞으로 펼쳐질 경치는 상상이나 했겠는가?
신미무명용사탑과 쌍충비각
쌍충비각이 있는 이곳은 신미양요의 광성보전투에서
미국의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함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전군의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곳으로 .
순절한 조선 후기의 무신 어재연(魚在淵)과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등의
전적을 기리는 전적비가 있는 곳이다.
1976년 광성돈대 복원작업의 일환으로 정비 보수되었고
해마다 음력 4월 24일이면 어씨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제를 올린다고 한다.
신미양요 순국 무명 용사비(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
강화군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
쌍총비 옆 내리막길에 있는 무덤이 궁금하던 차 지나가던 낯선 분이
여기에 와서 이 묘를 안 보고 가면 안 되지요 하는 말이 들려 내려 가 보았다,
그냥 지나쳤다면 후회 될뻔 했던 곳
.신미 순의총(辛未 殉義塚)
신미양요로 인해 광성보전투에서 미국의 해군과 격전 끝에 전사한 53인 중
어재연과 어재순은 고향에 안장하고 남은 51인은
신원을 분별할 수가 없어
여기 7기의 분묘에 나누어 안장하였단다.
殉義塚은 義를 위하여 죽은이의 무덤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가장 좁고 물살이 거센 이곳을 손돌목이라 불렸다
가장 놓은 곳에 위치한 손돌목돈대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고려 시대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피신가는 고종의 일행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가는 도중 물살이 점점 거세진 것을
왕은 뱃사공 손돌이 적과 내통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왕의 오해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뱃사공 손돌의 이름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안으로 계속 걸어가면 강화도의 돈대중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용두돈대가 나온다
길게 굽어진 강화해협을 따라 용의 머리 같다 해서 용두돈대라고 불려졌고
암반 위에 설치된 천연적인 교두보 역할을 한 용두돈대에서의 아름다운 경치는
탄성을 절로 나오게 한다.
(펌)
고려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시되었으며 1679년(숙종 5)에 돈대가 세워졌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르면서 외국 함대들과 벌인
치열한 전투로 성벽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당시 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돈대 앞을 흐르는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는
손돌풍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손돌목이다.
염하 건너편 덕포진 언덕 위에는 손돌풍 전설의 주인공 손돌의 묘가 있다.
墩臺라는 것은
경사면을 흙을 깎거나 성토하여 얻어진 계단모양의 평탄지를 옹벽으로 받친 부분을 말하는데
분수, 연못, 화목들이 조성되는 정원시설로서의 것과 성곽이나 변방의 요지에 구축하여
총구를 설치하고 봉수시설을 갖춘 방위시설로서의 것이 있다.
1679년 숙종 5년 강화에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으면
그 형태는 돌을 원기둥형으로 쌓아 곳곳에 총구멍을 설치하고
위에는 낮은 성첩을 쌓은 것을 돈대라 한다
이 비문의 글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이고
이은상님이 비문을 짓고 김충현님께서 글씨를 새겨져 있는 비문 앞에서
우리가 쓰고 있는 서예의 한글의 계보가 김충현의 글이라는 말에
너두 나두 사진에 담기에 경쟁했지요...ㅋ
가까이 보기 위해 클로즈업도 해 온 것 중 하나!
용두돈대에서 바라본 강화바다 햇볕 쨍하는 날이었다면
낙조의 묘미도 느낄 수 있었으랴만
잿빛 하늘에 숨은 해를 바라만 봐야 하는 아쉬움을 남기다.
이른 봄이라 할 수도 없는데도 차가운 날씨에
꽃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겨우 개나리 노란 꽃망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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