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에서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추천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의 커피 (0) | 2020.01.03 |
---|---|
내가 나를 위로 하는 날 (0) | 2020.01.03 |
내 나이 스물 하나였을 때 (0) | 2020.01.03 |
생일(生日) (0) | 2020.01.03 |
무지개 (A Rainbow ) (0) | 2020.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