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시

*옛날의 그 집 /박경리*

winstontower 2020. 1. 3. 10:39

 

 

 

                       의 그 집 

        

                        - 박경리-


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에서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추천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의 커피  (0) 2020.01.03
내가 나를 위로 하는 날   (0) 2020.01.03
내 나이 스물 하나였을 때  (0) 2020.01.03
생일(生日)  (0) 2020.01.03
무지개 (A Rainbow )  (0) 2020.01.03